강은혜

민병직(전시기획, 이론)


빈 공간을 채우고 있는 선들의 긴장감 있는 교차들, 그리고 보는 시선과 움직임에 따라 숱한 형태를 만들어내는, 그렇게 시각적인 면모들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작가의 작업을 보면서 문득, 이와 연관된 시각이론만으로는 왠지 무언가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각적은 것은 물론 작가의 작업이 실재 공간 속에서 다중 감각들로 작동하고 이러한 작동들이 보는 이들의 심리적, 정서적인 것들을 결부시키면서 이들 과정들의 반복, 중첩들이 사유의 어떤 근원적인 움직임마저 촉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작업이 강렬한 시각적 현전성은 물론 이러한 여타의 감각들과 사유를 촉발, 작동케 한다는 점은 꽤나 의미심장한 사실이 아닐까 싶다. 예컨대 시각적 착시로 인한 다형태성이나 환영성 또한 작업의 중요한 형태와 내용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단순히 옵티컬 아트 식으로만 한정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의 작업은 구성의 면모가 도드라진다. 지극히 동적이고, 혹은 정적인. 점으로부터 출발하여 가상의 면을 이루기도 하고 다시 일정한 공간을 분할, 생성하며 가변적인 공간의 동학을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드로잉처럼 자유로운 (혹은 정제된) 표현, 구성임에도 그 바탕에 있는, 공간을 긴장감 있게 연결하는 팽팽한 선들의 존재가 사뭇 의미심장하다. 가시적인 표현 이면에 함축되어 있는 이러한 긴장과 균형들, 그 모순들의 길항 작용을 통해 공간의 울림, 움직임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실재 현실의 공간을 대상으로 한 작업이기에 공간에 스며드는 빛과 그로 인한 그림자들이 엮어내는 변주가 일어나기도 하고 공간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부피감, 밀도감은 물론 관람객의 움직임들에 따라 공간들이 다시점으로 분할, 교차, 생성되면서 공간의 무한한 움직임, 차원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가까이서 보고 있노라면 작가가 주로 사용하는 선(cotton yarn) 특유의 질감으로, 단순한 긴장감만이 아닌 유연함, 연약함과 같은 따스한 느낌들마저 받게 된다. 실재의 이질적이고 다감적인 감각들이 결합되는 것이다. 공감각적인 이들 감각들의 대체적인 느낌은 모순적이라 할 정도 다층적이고 복합적이다. 가녀린 선들로 빈 공간을 채우고 있지만 꽉 차 있는 정지된 느낌만이 아니라 갖가지 동적인 움직임을 잉태하는데, 이를테면 또 다른 사이 공간, 열린 공간을 만들어내면서 본원적인 무언가를 계속해서 찾고, 만들어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일 것이다. 

채움과 비움이 반복, 교차되면서 새로운 공간, 장소성을 만들어내는 이러한 동학 속에서 관람객 역시 모순적이지만 새로운 감각, 정서 경험들, 곧 시각마저 현혹되는 복합적인 감각작용을 통해 정적이지만 동적인 느낌은 물론, 가상의 부피감, 중력감, 질감과 같은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되는 새로운 공간 경험을 하게 된다. 작가 역시도 이에 못지않은 각별한 경험을 해야 했을 것이다. 끊임없이 공간을 분할, 구축하는 반복되는 작업 행위들이 다시 작가의 마음마저 비우는 수행성의 차원 또한 획득했을 테니 말이다. 강한 노동력이 수반되는 섬세한 작업 행위들은 매순간 다른 경험들이 마주하면서 이들 변수들을 조율하면서 자유롭게 무한한 공간을 생성, 확장시키는 것이기도 하고 팽팽한 긴장감과 어떤 균형들을 공간에 부여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공간적인 작업에 더해 시간의 흐름마저 중첩시키는 행위인 셈이다. 긴장과 평온, 채움과 비움, 유와 무와 같은 서로 다른 것들을 교차, 반복하면서 정신적인 수행성의 차원조차 만들어내면서 말이다. 구상적인 행위이지만 추상적인 정신성의 차원을 획득했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공간을 모순적인 긴장감으로 엮어내지만 그 변화무쌍함 생성의 동학 못지않은 안정적인 조화, 균형들이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질서가 아니라 유동적인 리듬의 차원들이 이질적으로 결합된 것들이다.  

그런 면에서 무수한 선들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가변적이고 다면적인 형태, 형상들의 자유로움을 유희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오히려 이들 선들의 움직임들이 만들어내는 공간 자체들, 그리고 이러한 공간들이 내밀하게 품고 있는 긴장과 균형들, 그 변화의 동학이 촉발하고 있는 것을 더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선들의 배치가 만들어내는 감각 너머의 어떤 의미들, 좀 더 넓고 깊은 의미들로 작가의 작업이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형태들을 기반으로 하는 기하학이 세상의 긴장과 균형마저 담은 개념적인 본질을 함축하고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빈 공간의 함의들, 곧 비어있지만 숱한 가능성들로 채워져 있는 모순적인 공간의 논리, 잠재적인 변화가능성과 생성의 동학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어떻게 보면 단순하다고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작업의 논리, 구조에도 불구하고 미묘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공간의 동학을 이루는 다감적인 감각의 작동들과 이와 연관된 다기하고 본원적인 사유들을 촉발하게 한다는 면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작업은 추상적이라 할 만하다. 복잡한 현실의 세계를 축약, 단순화시키면서 비가시적인 세상을 가시화시키는 추상은 기본적으로 세상에 대한 본질적이고 환원적인 접근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세상이 갖고 있는 어떤 역설, 모순, 긴장감, 그리고 이를 통합하려는 균형, 조화의 차원을 동시에 내포한다. 작가의 작업에서 그 바탕이 되는 빈 공간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백처럼 선들의 존재, 그 다양한 있음을 가능케 하는 것도 결국 텅 빈 공간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작업에서 볼 수 있는 선의 움직임들을 통해, 역으로 그 선들 사이로 자리하는 비어 있는 공간들을 새삼 주목하게 만들기도 한다. 있음을 통해 없음을, 그리고 다시, 없음을 통해 있음이 서로 무수히 교차되면서 무한한 공간들이 생성되는 이러한 변화, 확장의 과정 속에 세상의 이치 또한 자리할 것이다. 선을 매개로 하여 그 시원, 출발이 되는 점을 반추하게 하고 다시 이러한 선들이 모여 면을 이루고 그 면들이 적층되어 입체적이고 유동적인 공간을 구성하는 잠재적이고 현실적인 생성의 과정 속에서 세상의 본원적인 구축 원리라 할 수 있는, 어떤 근원적인 것들, 정신적이고 개념적인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저 복잡다기한 세상의 어떤 본질들과 맞물려 있는 셈이다. 본원적인 것을 반추하게 하면서도 다시 현실의 변화무쌍한 것들로 변화, 확장된다는 면에서 말이다. 그리고 지극히 구체적인 현실적 질료의 공간 속에서도 숱한 상상을 촉발하게 하고, 이렇게 서로 다른 것들을 긴장과 균형을 반복하며 연결하고, 관계 짓게 한다는 면에서 지금, 여기 현실의 세상마저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현실적인 세상과도 관계를 맺고 있다. 이는 작가 작업이 기본적으로 갖는 잠재적인 변화 가능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바탕에 세상과 유비할 수 있는 다기한 의미들 또한 열어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질서와 원리를 내포하고 있는 한글의 선들부터 영감을 받은 작가 작업의 출발부터 이러한 의미 연관성은 자리한다. 다만 명시적이고 직접적이지 않을 뿐, 그렇기에 작가의 작업은 세상의 다기한 면모들, 그 (비가시적인) 의미들마저 드러낸다. 서로 다른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것들이 복잡한 듯 단순하게 연결되고 공존하는, 그렇게 긴장과 균형을 반복하면서 서로 얽혀 있는 세상 자체의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이러한 의미들과 복잡하게 관계 맺는 작가 자신을 빗대기도 하고 시공간의 유동적인 흐름 속에서 또 다른 변화를 계속해서 생성하고 있는 어떤 상황들을 드러내기도 한다. 특히나 평면과 설치, 내부와 외부, 그리고 갖가지 매체를 넘나드는 작가 작업의 자유로운 변환들은 특정한 상황들 연결되어 있는 다채로운 의미 가능성을 열어놓기도 한다. 더욱이 작가의 작업의 경우 관객의 가변적인 시선들은 물론 참여와 체험을 통해 이루어지는 점을 감안할 때, 단순히 개념적이고 물리적인 공간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의 참여와 체험으로 엮어내는 장소성의 차원마저 획득한다. 공간의 맥락이 되는 특정한 장소성의 맥락 또한 고려하여 여기에 의미들을 더하는 작가의 작업 과정 역시 이를 뒷받침하게 한다. 이렇듯 작가의 작업은 다양한 공간의 안팎을 마주하고 이들 공간을 각별한 의미의 장소성으로 변화시키면서 확장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확장은 때로는 다양한 형식의 매체, 장르로 변환되기도 하면서 계속 진행 중인데, 작업의 공간적 구조와 동학을 바탕으로 여기에 사운드, 영상테크놀로지와 같은 시청각적인 장치를 비롯하여 관객들의 적극적인 참여, 퍼포먼스, 인터렉티브적인 요소 등의 촉각적이고 신체적인 에너지 등을 더해 극적인 사건의 상황들마저 만들어내고자 하는, (비록 아직은 궁리 중이라는 단서를 달아야겠지만) 다채로운 가능성들까지 열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자라나는 것처럼 끊임없는 연결, 접속을 통해 이를테면, 관계, 생성의 동학이라 할 만한 것들을 엮어내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새로운 변화, 생성들을 만들어내듯이, 작가 작업의 선을 통한 연결, 구성의 동학도 그 잠재적인 변화 가능성과 실재적인 현실화를 거듭하면서 결국은 세상 자체와 다를 수 없는, 어떤 본질적인 논리들마저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