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을 사유하는 선

 

하계훈(미술평론가)

 

강은혜는 유학시절 의상의 패턴을 고안하는 과정에서 한글의 형태에 주목하게 되었다. 한글이 만들어진 과정과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과 그럴듯한 설명이 있었지만 1940년에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에 의해 한글창제의 원리와 발성법 등이 글자의 형태와 관련이 있음이 알려졌다. 그러나 이와 무관하게 강은혜가 주목한 한글의 특징은 기하학적 성격과 추상적 표현을 가능하게 해주는 형태적 요소였다.

강은혜가 한글의 조형적 표현 가능성에 주목하게 된 것은 미국 유학이라는 상황이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학 경험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감할 수 있겠지만 많은 작가들이 국내에서 미처 보지 못한 점을 국외에서의 체류를 계기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작가는 이처럼 유학이라는 국외체류 시기를 계기로 한글을 바라보는 시각을 좀 더 객관화할 수 있었고,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전의 몇몇 작가들의 시도와는 다르게 조형의 근본적인 요소로서의 선의 형태에 주목한 점, 그리고 이것을 다시 공간으로 확장하여 선이 작용하는 공간의 표정과 의미를 천착한 점이 작가의 오늘날의 작업에까지 이어지게 된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강은혜는 한글을 모티브로 한 평면과 설치 작업에서 시작하여, 이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에서의 선의 개입에 의해 유발되는 심리적, 미학적 현상에 관심을 갖는 작업으로 창작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이러한 작업의 성격 때문에 강은혜의 작품에서는 회화나 설치 작업으로서의 표현을 넘어서서 건축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는 조형과 공간 기획의 원리가 읽혀지기도 한다. 강은혜의 작품에서 실제로 건축적인 구축은 이루어지지 않지만 작가가 선을 통해 개입하는 공간에서는 심리적인 구축과 분할이 발생하며 이를 통해 공간의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지며 새로운 공간의 표정이 만들어질 수 있다.

기본적으로 강은혜의 작업에서는 평면이냐 입체 공간이냐에 관계없이 직선이 작업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물리학적으로 모든 선은 직선이며 점과 점 사이를 잇는 최단거리의 이동 이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관점을 유지하는 분석기하학(Analytic Geometry)과 달리 결합기하학(Incidence Geometry)에서는 선 그 자체를 점과 무관한 독립된 개체로 보기도 하지만, 강은혜의 작품에서는 기하학적 이론들과 관계없이 점과 선의 종합으로서 만들어지는 평면과 공간의 이미지들이 조형적으로 어떻게 기능하고 그 결과로서 어떠한 미학적 효과를 산출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추상 이전의 회화가 빈 캔버스에 일루젼을 도입하여 입체감과 공간감을 이끌어내는 것이었고 일부 추상 작품에서도 이미지의 상징성과 색채의 속성에 의해서 깊이감이나 운동감을 유발하였다면, 강은혜의 공간 역시 빈 캔버스같이 무(無)의 공간에서 조형적 의미와 심리적 자극에 일어나는 선의 개입을 통해 입체적 공간을 재단하는 장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평면 회화 작업에서는 색과 형태를 비롯한 다양한 조형 요소가 단독으로 혹은 조합에 의해 화면에 표현되면서 작품으로 완성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필요에 따라 단절과 불연속의 상황을 연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강은혜의 공간 설치 작업에서는 선의 조형성과 함께 선이 갖는 운동성 등이 중요한 작업의 요소가 되면서 평면 회화에서 볼 수 있는 선 이외의 다양한 요소의 도입이 가능하지 않게 되는 측면이 있다. 이러한 속성은 작품의 다양성을 제한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작품을 통해 구현하는 주제와 메시지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특징이 되기도 한다.

강은혜의 작품이 선을 중요한 미디엄으로 도입함으로써 표현되는 평면과 공간을 형성한다면 여기서 더 나아가 그 선들은 반복과 중첩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형성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화가들이 추구한 일루젼을 구축하기도 한다. 여기에 선을 통한 색채의 도입을 더함으로써 강은혜의 작품은 평면과 공간에서 확장된 회화성을 획득할 수도 있게 된다.

강은혜는 모든 형태의 기본을 선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선이 만들어내는 관념과 조형적 아름다움에 주목한다. 작가는 점이나 평면이 정적인 것에 비하여 선은 운동성을 갖는 특징이 있다고 본다. 작가는 이러한 선의 의미와 선과 선이 상호 관계를 맺음으로써 생성되는 조형과 공간에서 관계와 소통, 수행과 명상, 채움과 비움 같은 철학적 사유를 유발하는 점에서 자신의 작품이 예술적, 사회적 기여를 하고자 함을 작품의 주제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강은혜의 공간 설치작품은 일반 미술작품이 전시공간에서 관람객과 교류하는 방식보다 더 공감각적이고 관람자 참여유발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속성 때문에 보다 신선하고 흥미롭게까지 느껴질 수 있다. 강은혜의 작품은 관람자가 작품 공간을 돌아다니면서 결정되는 시점으로부터 작품과 공간의 관계, 그 안에서 관람자의 좌표와 작품의 관계, 그러한 관계에서 창출되는 미학적, 심리학적 의미 등이 다양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이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부분적으로 옵티컬아트의 속성과 공유되는 측면이 있으며 이러한 강은혜의 작품에서 직선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요소는 빛일 것이다. 작품 속에서 조명의 위치와 밝기, 색상, 그리고 조명의 성격에 의해 결정되는 공간의 느낌 등은 또 다른 작품 감상의 요소가 된다. 작품의 설치가 건축적인 공간을 대상으로 할 수도 있겠지만 옥외 공간을 대상으로 할 경우에는 직선과 빛이라는 요소에 더해서 공기의 흐름이나 온도, 습도 등 다양한 요소들이 작품의 성격에 미세한 차이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강은혜는 자신의 작품을 설치하는 과정을 ‘수행’에 비유한 적이 있다. 작품의 구상 과정이 창작이라면 설치 과정은 노동을 수반하는 반복적인 작업일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작가는 예술적 명제를 포함한 우리 삶의 전체를 사유하고 성찰하는 기회를 갖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강은혜의 선을 통한 공간 설치 작업은 기본적으로 시각을 동원하면서 청각과 촉각 등의 감각으로 확장시키는 예술적이면서 철학적이고, 좀 더 나아가서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사유와 명상을 가시화하는 차원 높은 작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